8월의 과학사: 붉은 세상의 개척자

미국과 소련이 달을 향한 레이스에 들어갔던 1960년대, 그 대결이 아폴로 11호 착륙으로 종지부가 찍힌 이후에도 우주 패권 경쟁은 다른 방향으로 지속되었다. 달보다 더 먼 곳을 향하는 우주탐사의 시대. 미국과 소련의 목적지는 다른 행성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그 중 화성에 착륙하여 그곳에 있을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미션을 받은 탐사선 ‘바이킹 1호’가 1975년 8월 20일에 그 여정을 시작하였다.

발사되는 바이킹 1호의 모습


망원경으로 우주를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시절, 행성은 미지의 공간 그 자체였다. 밝기와 색깔만 구별이 가능한 별과 달리 그 형태가 보이는 행성에 무엇이 있을지 예측하는 것 자체가 학자들의 영역을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 선두주자에 있던 사람이 바로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었다. 로웰은 화성의 표면을 관측하면서 인공 운하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1906년 출간된 그의 책 제목이 ‘화성과 그 운하’라는 점을 보면 그가 이 주장을 얼마나 진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그는 화성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화성인이 행성 전체를 감싸는 운하를 건설했다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이 주장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반박되었으나 ‘화성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대중에게 주는 파급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퍼시벌 로웰(좌)의 모습. 그는 과거 조선에 방문한 적도 있는 외교관이기도 했다. / 로웰이 그린 화성 운하의 모습(우)


화성인에 관한 사람들의 상상력이 점점 더 커질 무렵 관측을 통한 연구 결과는 혼란 그 자체였다. 화성 대기에서 산소가 발견되었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공존했고 어둡게 보이는 표면이 이끼류 같은 생명체에 의한 현상이라는 연구까지 등장했다. 관측자마다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는 것은 그 연구의 신뢰성이 높지 않다는 것이니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 연구한다는 것은 학자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실제로 화성 탐사에 한발 먼저 뛰어든 곳은 미국이 아닌 소련이었다.

소련 초기 화성 탐사선인 마스 1호의 모습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으로 자신감에 차 있던 소련은 1960년 최초로 화성에 탐사선을 발사한다. 그러나 출발한 탐사선 2대는 모두 지구 궤도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만다. 1962년에 발사한 세 탐사선 중 두 탐사선은 실패했으나 마스 1호 우주선만 간신히 화성 근접 통과에 성공하게 된다. ( 물론 그나마도 원래 계획보다 훨씬 먼 곳에서 화성 주변을 지나게 되었다. ) 이처럼 소련이 계속된 실패를 쌓아가고 있을 때 미국 역시 화성 탐사에 참전하게 된다. 그렇게 1964년 발사된 매리너 3호와 4호 중 4호는 최초로 화성 근접 통과 중 사진을 전송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 찍힌 모습은 황량한 땅, 그 뿐이었다.

매리너 4호가 촬영한 화성의 모습


이후에도 화성 탐사를 위한 발사는 계속되었다. 다만 그 결과가 수많은 실패로 남았을 뿐이었다. 매리너 4호 이후 1973년까지 미국과 소련에서 발사한 탐사선 13개 중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진행한 것은 단 3개 뿐이었다. ( 미국의 매리너 6호, 매리너 7호, 매리너 9호. 그 중 매리너 9호는 최초로 다른 행성의 궤도를 돈 탐사선이 되었다. ) 특히 소련의 경우 해당 기간 중 발사한 탐사선 대부분이 화성 착륙을 목표로 했으나 모두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전송하지 못했다. 겉모습은 보여주었으나 그 땅만큼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화성에 미국이 드디어 바이킹 1호와 2호를 통해 착륙에 도전한 것이었다.

바이킹 착륙선의 모습. 같이 찍힌 사람은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칼 세이건이다.


바이킹의 목표는 화성 착륙 한 가지가 아니었다. 화성의 기후 분석, 화성 표면 촬영 및 표면 구조 분석 등 다양한 목표를 추가로 품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화성 생명체의 증거를 찾아야 했다. 이미 여러 탐사선이 알려준 내용에 의해 로웰이 이야기했던 화성 운하 이야기는 완전히 박살났지만 여전히 저 붉은 행성에 생명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바이킹 탐사선에 탑재된 생물학 실험 장치들은 그 결과가 어찌 나오건 굉장히 흥미로운 화두를 던져 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여러 목적을 짊어 진 바이킹은 순조롭게 우주를 항해하여 1976년 6월 19일 화성 궤도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4일. 미국의 독립 기념일에 착륙하려 했으나 바로 약간의 문제를 발견한다. 궤도선으로 탐색한 결과 기존 착륙 예정지가 생각만큼 안전하지 않았다. 이전에 실패한 소련의 착륙선들이 모래 폭풍 속으로 무리하게 착륙하다 실패했다는 점을 감안 하면 궤도선의 자료를 통해 임무 시기를 수정한 이 결정은 아주 현명하게 작용했다. ( 애초에 소련 착륙선은 중간에 미션 변경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 그리하여 7월 20일 분리된 바이킹 1호의 착륙선은 인류 최초로 화성에 그 발자국을 남기게 되었다.

바이킹 1호가 최초로 찍어서 전송한 화성의 땅


이어서 같은 해 9월에 바이킹 2호까지 착륙에 성공하면서 거대하고 황량한 붉은 행성을 마주하게 된 인류는 곧바로 여러 가지 미션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토양 분석, 대기 분석을 통해 화성의 과거를 약간이나마 예측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대망의 생명체 탐사 실험이 준비되었다. 채취한 화성 토양을 지구에서 가져간 영양소 용액과 혼합시켰더니 신기하게도 화학적인 분해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무려 예상치의 15배나 되는 산소가 나타난 상황에서 같은 실험을 일주일 후 다시 진행했으나 이번에는 반대로, 검출되는 것이 없었다. 첫 번째 토양 샘플에는 미생물이 있었고 두 번째 샘플에는 미생물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어떠한 화학 작용이 생명체와 관계없이 일어나 용액을 분해한 것일까? 또한 다른 생명체 탐사 장비에서는 모두 특별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이 용액 실험에서만 바이킹 1호와 2호 모두 이상한 결과가 나온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샘플 채취를 위해 바이킹 1호가 판 화성의 토양


실제 바이킹 탐사선의 생명체 탐사 실험은 여러 논란을 낳았고 현재는 ‘이것으로 생명체가 있다 없다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바이킹 탐사선의 착륙 성공 이후 현재까지 무수히 많은 탐사선이 발사대를 떠나 우주를 항해했다. 신기하게도 처음 화성 탐사를 시작한 소련, 지금의 러시아는 아직까지도 화성 착륙에 실패했지만 미국은 패스파인더(1997), 스피릿과 오퍼튜니티(2004), 피닉스(2008), 큐리오시티(2012), 인사이트(2018). 퍼서비어런스(2021) 등 여러 탐사선을 착륙시켜 화성의 비밀을 풀어나가고 있다.

가장 최근 화성에 착륙한 탐사선 퍼서비어런스에 탑재된 드론 인제뉴어티의 모습. 화성에서 최초로 비행한 인공 물체가 되었다.


로웰이 그렇게 찾아다녔던 운하는 없어도 화성에 실제로 물이 흘렀다는 것은 확실하며 과거 화성은 분명 지금의 황량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곳에 생명체가 있을지, 아니면 생명체가 있었을지는 아직도 100% 확신할 수 없다. 1975년 이후 4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이제는 탐사선을 넘어 사람이 직접 화성에 갈 계획까지 나오고 있다. 그곳에 생명체가 없다면 우리가 화성에 서 있는 화성 생명체가 되면 그만 아닌가. 우리가 지구인이자 화성인이 될 날이 금방 다가오기를 기원해본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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